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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칼럼

음악, 미친 사회의 배경음악으로 전락하는가?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맹목적인 환호’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었다.


“한 극장에서 멋진 쇼가 진행되고 있었다.막이 끝날 때마다 잠시 불이 꺼지고 새로운 쇼가 진행됐다.그런데 그 쇼는 갈수록 재미가 있었다.관객들은 환호하며 쇼를 즐겼다.그런데 지배인이 갑자기 나타나 관객들에게 호소했다.‘지금 극장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관객들은 질서있게 밖으로 대피하십시오’ 그러나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관객들은 오늘 밤 가장 멋진 쇼가 곧 공연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지배인은 거듭 대피를 요청했으나 그럴 때마다 더욱 큰 박수가 쏟아졌다.마침내 거센 불길이 극장 안을 모두 삼켜버렸다.그제서야 관객들은 맹목적인 환호의 위험을 직감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얼마전 개그맨 최효종을 국회의원 집단 모욕죄로 고소한 강용석의원은 결국 자신이 애매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고 이 사건 이후로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말을 섞지 않는다고 엄살?을 떨며 주위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애정남은  예상을 뛰어 넘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필요로 하는 듯한 인상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동전의 양면과 같기도 하고 또 양날의 검과 같이 양면성을 지녀서 쉽게 판단하거나 정의하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음악> 또한 이와같은 성질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과거 연인을 만난 듯한 감동으로 다가 오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하고 때로는 속쓰린 마음을 달래 주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주변에서 발달된 음악의 쓰임새는 꼭 이러한 아름다운 형태는 아닌가 봅니다.

노래방에서는 당당히 돌씽을 선언한 언니들의 파격?적인 몸부림과 함께하는 달콤한 음악이 있고 클럽에서는 함께하는 사람의 신분과 상관 없이 그리고 이후에 벌어질 일들에 게으치 않는 흐트러진 음악이 귓전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음악활동의 주체인 가수들은 여론에 힘입어서인지 기획자의 의도에서인지 <벗기 경쟁>의 가속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이렇듯 무한경쟁과 상업화의 수하로 전락하는 음악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의 과거 단순하지만 풍부한 감성이 뭍어나는 옛노래를 동경하곤 합니다.

이러한 저속한 양상의 음악현상은 혼란스런 사회분위기와도 상관관계가 있어보입니다.

어느 설물기관에서 조사한 결과 직장내에서 남성은 2명 가운데 1명(56,7%) 여성은 3명 가운데 1명(31,6%)꼴로
오피스 허즈번드(office husband) , 오피스 와이프(office wife)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배우자 모두 가정이 아닌 직장이 삶의 주무대가 되었고 여기에서 만나게 되는 직장동료의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굳이 이들이 실제 부부나 연인 사이가 아닐지라도 분명한 것은 실제 배우자 보다도 서로에 대한 의존도와 친밀감이 높다는 것입니다.

더 발전해서 얘기를 하자면 그 이상의 어떠한 행동도 뒤따를 수 있고 무엇보다 이는 가정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의 반증이기에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부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신뢰와 존중이 아닌 <돈>이 되어버렸고 이에 따른 가정들의 바지런함과 여기에도 만족 못하는 빠듯한 삶을 꾸려가는 주부들의 이유 있는 항변?은 꼬리를 무는 악순환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굳이 누구의 책임이라 할것도 없이 그렇다고 누구의 성격을 탓할 소지도 아닌 듯 합니다. 그렇다고 개인의 무능력과 나태함이라고 치부 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개인을 포함 사회적 구조적? 모순이 낳은 희생과 현대인의 아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결과는 위에서 말하는 굴절 된 모습으로 나타나며 이미 가정과 배우자는 법률적 무늬만 갖췄을 뿐 그 기능과 의의를 상실한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어느 중년은 20여년 성실하게 직장생활에서 얻은 수익을 고스란히 부인에게 건네주었었는데 퇴사 이후 두어달만에 이혼 당했다는 합니다. 최근 성탄 선물로 <이혼>을 요구하는 우스운 사례도 있고 또 자녀의 대입 이후로 거사를 미루기도 하며 평생 살아 오고 인내해옴을 원망하며 이뤄지는 황혼이혼도 이제는 낮설지 않은 모습입니다.

이처럼 한번 삐뚤어진 가정과 사회의 어긋남은 또 다른 파장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모양새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곪은지 오래된 상처만이 방치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겉으로는 점잖해 보여도 친구와 어울려 소위 업소를 찾을 때면 일탈의 모습을 쉽게 엿볼 수 있으며 이는 점점 심화되어 가는 듯 합니다.

청소년의 비행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며 이처럼 학원과 사회의 총체적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암흑가> 혹은
<거대한 검은 조직>과 같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렇지 않지만.... 하지만 이러한 모습이 너무도 역력하게 주위 곳곳에서 깊숙히 자리 잡고 있기에 씁쓸한 마음은 더해만 가며 여기에 멋드러진 <효과음>으로 전락한 <음악>은 미친 세상의 최고급 옵션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맹목적인 추종은 결국 파멸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굉음을 울리는 현대의 요란함 가운데 여기의 추임세로 쓰이는 음악은 돈이면 뭐든지 허락되는 그런 값싼 존재로 전락 된 느낌입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100배에 달하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어느덧 다른 이슈에 가려져 조금 잊혀진 듯 기억에서 가물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앞으로 500년 이후라야 가능하다는 일본정부의 발표가 있을 정도로 심각하며 무엇보다 부산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원전사고의 흔적이 아닌 일반인이 모르는 가운데 이미 한반도 전체가 피해 영역 안에 들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옳곳은 북한은 일본의 적절한 성의? 때문인지 말이 없는 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하고자 하는 얘기는 모든 면에서 설마하는 사이에 심각한 피해 영역에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요지는 막연한 바램이 아닌 현재를 정확히 진단하고 앞으로를 내다보는 통찰력도 어느정도 필요 할 것입니다.
운전자들은 사고 진전에 거의 99% 사고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돌이킬 수 없습니다. 왜냐면 자기 마음데로 제동 할 수 없는 "속도"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고 직전 10km 가속하느냐 아니며 10km 속도를 줄이느냐에 따른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지며 이처럼 요란한 세상을 살아가는 미묘한 자세의 차이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영어를 가리켜 세계 만국어라고 하는데 이보다 더한 의미가 있으니 다름 아닌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돈만 있으면 설령 그가 침묵으로 일관한다고 할지라도 세상에서 이루지 못할게 거의 없으며  제아무리 지혜와 논리를 갖춘 탁월한 설득력의 달변가라 할지라도 <돈>이 없으면 그는 방정맞은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뭐든지 돈에 의해서 계급이 형성되고 이는 곧 인격으로도 비화되며 심지어 가정의 파탄과 인성 파괴로 이어지는 자본주의가 낳은 물질만능주의의 병폐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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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회에서 설교자가 지각하는 바람에 사회자는  시간을 벌려는 속셈에 준비찬송으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불렀다고 합니다. 순간.... 설교자가 도착하자 사회자는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신도들에게 큰 박수로 설교자를 맞을 것을 유도했다고 합니다.

이것 또한 순수하고 거룩한 음악이 훼손 당하는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설교자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존재가 돼버렸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죄와 타락이 범람해도 진리는 영원히 존재하며
아무리 세상의 종교와 종교인들이 어리석은 우를 범하더라도 상처난 영혼을 눈물짓고 긍휼히 여기는 진리와 절대자는 여전히 존재 할 것입니다.

때로로 갖는 <음악>이 미친 세상의 시녀로 전락한 느낌은 어쩔 수 없고 그런 사회의 고상한 효과음으로 비춰진다고 할지라도 <음악>만한 파괴력 있는 영향력 행사는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기에 <음악>에 대한 동경과 향수는 여전히 이어져 갈 것입니다.

<음악>은 인간을 향한 신의 최고의 선물이자 또 다른 신의 형상,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