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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칼럼

<고해>재해석, 1등도 살기 어려운 더러운 세상?






이번주 나가수 11R 2차 경연에서 박완규가 <고해>로 1위를 차지한 이후로 길거리에서는 온통 박완규의 <고해>로 들썩이는 분위기입니다. 왠만한 핸드폰 가게를 가도 ... 바로 그 옆 빵집을 들러도, 시내 여기 저기서
<고해>의 메아리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느낌입니다.

이 노래를 부른 박완규의 애절함 때문인지 아니면 그 가사가 절박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좀 심하다 싶을 정도의 사회적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이 곡을 쓴 임재범이 이 곡의 대상이 여인이 아닌 절대자에 대한 내용이라고 최근 밝혔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임재범의 얘기는 하나의 얘기로 치부하고 그냥 노래에 심취해 흐느적거리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곡을 쓴 임재범의 얘기 따로, 노래를 감상하는 이들의 이해는 따로라는 느낌을 얻게 됩니다.
요지는 노래의 대상이 <연인>에서 <절대자>로 바뀐다면 곡 전체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굳이 애둘러 표현하지 않고 곡의 의미를 짚고 넘어가자면
<고해>는 그동안 알고 있는 사랑하는 어떤 연인에게 던지는 고백도 아니며  <절대자>에 대한 사랑도 아니라고 봅니다
절대자는 사랑의 대상이 아닌 현재의 상처와 박탈감에서
찾아 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
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세상
의 비난도, 미처가는 제 모습, 피흘려가는 제 모습이 두렵다........

                                   어디에 있나요...사랑합니다. 용서해주세요... 허락해 주세요

이상의 가사를 보면 자신의 큰 잘못으로 인한 번뇌와 사회적 비난에서 오는 상처와 박탈감을 알 수 있고 결국 절대자를 사랑해서가 아닌 유일한 통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곡의 원인은 신에 대한 사랑이 아닌 사회적 상처와 거절이라는 것입니다.

몇해전 개그콘서트에서 개그맨 박성광이 남루한 모습으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외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 한마디에서 오늘날 현대인들이 그리고 가엾은 젊은이들이 겪는 거절과 아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항상 인내와 기다림 그리고 희망에 길들여진 젊은이들은 막연한 희망으로 해결되지 않을 현실을 직시라도 한 듯 그들의 눈치가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무엇보다 현재 입장을 떠나서 그동안 그들이 감수했던 맹목적인 억압은 일탈의 불씨가 되었고 사회 제도적 모순은 이제 그들에 대한 반항으로 돌아 선 느낌입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노년의 교육자는 <교육의 증발> <탈출구 없는 교육현실>이라고 꼬집어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박성광의 현 사회를 꼬집는 말도 수정해야 할 듯 합니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 아닌 1등도 힘들어지는 세상이 된 듯 합니다.
지난 주 2위에 이어 이번주 나가수 경연에서 1위를 차지한 박완규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부인과 헤어졌고 합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열창에 호들갑을 떨지만 필자는 두고두고 박완규의 이러한 아픔이 쉬이 지워지질 않습니다
임재범 또한 절박한 경제사정을 이기지 못하고 제 발로 경연에 합류한 것을 보며 그간 외형적으로는 그 분야에서 최상의 인기와 자리에 오름에도 일순간 추락하는 모습을 접하며 1등도 힘들어지는 세상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최근 순창에서 먹이를 제대로 먹지 못해 소 10마리가 아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동사라고 하지만 제대로 먹이를 먹지 못해 이에 따른 면역성 결핍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소값은 한 없이 떨어지고 사료값은 치솟아 오르니 결국 농민은 소에게 거의 물만 먹였다고 합니다. 반면 송아지 값이 만원까지 떨어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사회적 경제난은 청년실업을 포함한 농민, 자영업자 전체에 이르는 골칫거리이며 아마도 미래에 또다른 재앙의 형태로 나타날지 모를 일입니다. 지금도 중산층 이하 대부분이 이런 곤경에 처해 있는데 앞으로 급속도로 증가 할 노인의 대책은 속수무책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나마 노인들의 한가닥 희망이었던 택시나 경비, 폐지를 줍던 일도 때아닌 높은 경쟁율을 보일지 모르며 무엇보다 장수를 자랑하는 요즈음  언제까지 그들이 이러한 허드렛일을 해야 할지 걱정스러울 따름입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미래는 힘들다라는 표현보다 <없다>가 적절한 표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경제사정이 아닌 의식의 문제인것 같습니다.
소위 요즘 남자, 여자들은 집 안에 있으면 내 사람이어도 집 밖을 나서면 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를 만날지 모르고 만날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지조관념도 없고 이런 마당에 어떤 순진무구한 사랑을 찾는 것은 춘향이가 부활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또 강남에서 애인이 없으면 일종의 장애인이란 우스겟소리도 있습니다. 비유나 과장이 아닌 상당한 현실적인 표현이기에 우리의 미래에 대한 회의적 견해는 커져만 갑니다.
어쩌면 이렇게 급속도로 변하는 사회적 트렌드에 발맞춰 순응하는 방법도 하나의 지혜에 해당하지만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관해 감당해야 할 뒷 얘기가 상상으로 가늠 할 수 있을지 모를 일 입니다.

이처럼 경제면에서 특히 의식적인 면에서 무너지고 무뎌진 모습을 보면서 총체적인 위기를 접하면서도 여기에 게의치 않다는 것이 더
큰 문제
라고 생각합니다.

없는 사람들은 없어서 난리이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갖고서 꼼수?를 부리는데 묘한 대조와 일그러진 공통점을 보입니다.

과연 현대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세상은 무엇일까요?

재벌들이 내놓는 적당한 기부금이나 적선으로 가능할까요? 아니면 현재의 상황에서 경제적 형편이 좀 나아지면 그 이상이 실현될까요? 아마 조금은 영향은 있겠으나 절대적인 이상과는 거리가 멀어보입니다.

임재범, 박완규가 불렀던 <고해>는 그 대상이 어떤 연인이 아닌 절대자라고 하지만 그 절대자를 찾기까지의 직접적인 원인은 사회적 거절과 상처임을 알 수 있고 여기에서 시작한 글은 묘한 대안을 제시하기는커녕 오리무중에 빠지는 모습입니다

자기의 노력과 의지로 전체의 빈곤을 해결 할 수도 없고 사회적 일탈현상을 막을 순 없지만 그래도 자기의 생각만큼은 스스로 정화해 나가는게 작은 소망이자 이 글의 요지인것 같습니다.


순수(Purity)의 바탕 위에
열정(Passion)을 갖고서 아름다운 열매를 일궈(성공) 자기자랑이나 과시가 아닌 그것을
평화(Peace)의 도구로 삼는 이상이 조금씩 실현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3P Mov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