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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칼럼

알리 기자회견이 말하는 그늘진 사회현상














알리의 자작곡 "나영이"이는 이제 가요계를 넘어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이슈로 자리잡으며 쉽사리 진정될 조짐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시작은 순수한 의미에서 출발했다고 하나 나영이 본인의 아픔과 수치를 드러내는 것 이외에 사실에 반대하는 듯한 인상의 가삿말은 모든 대중의 우려와 공분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급기야 가수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고서 아버지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경솔함에 대한 사과와 함께 과거 자신이 당했던 성폭행에 관한 얘기마저 털어 놓은 용단을 감행합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일각에서는 문제의 발단도 알리의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 된 점과 알리가 여자로서 밝히기 힘든 과거사를 털어놓은 점을 감안 할 때 그에 대한 분노를 자제하자는 분위기도 일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다보니 딱히 뭐라고 꼬집어 잘라 말하기 애매모호한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하루만에 그녀가 벌려 놓은 사단을 모른채 외면 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렇다고 이번 기자회견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 낼런지는 모르나 앞으로 알리의 활동에도 심각한 제약이 따르리라 예상됩니다.

순수한 동기가 모든 과정을 정당화시키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의 시작은 지극히 작은 오해와 혹시나 하는 방심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가수를 포함한 예술인은 수많은 상황과 문제를 접하며 그리고 무한한 창작의 세계를 누비며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늘 매력적인 일입니다.
이런 와중에 자신이 그동안 고민하고 관심 가져 온 사건과 연관지으려는 성향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알리의 "나영이"도 이와 같은 유형의 산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들 아는 바와 같이 방법이 잘못 됐다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큰 충격과 상처를 입으면 일단 이것을 부인하려 하며 그 사건 자체를 혹은 그 환경에 놓인 자신을 잊으려 합니다. 처음에는 당시의 생생한 고통으로 힘들어하고 한동안 쉽게 잊혀지지 않은 기억으로 인해 속앓이를 겪게 됩니다.
이러는동안 시간이 흘러 과거 그 상황과 감정에서 조금은 객관적 입장에서 안정 된 자세를 찾게 되는데
여기에는 귀가 닳도록 던지는 주위의 위로나 동정보다 오히려 이를 잊고 극복을 가능케 하는 시간의 공백과 "망각"이라는 신의 아름다운 선물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알리는 무참히도 개인적인 의욕과 어리석음으로 이러한 치유의 과정들을 일순간 깨트리고 만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알리의 어머니나 혹은 자신의 가족이 나영이와 같은 몹쓸짓을 당했을 경우 이렇게까지 누구를 지칭하며 노래하며 발설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단지 나영이는 제3자에 해당된 인물이기에 조금은 덜한 부담을 느꼈겠으나 반대로 나영이의 입장은 이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절제와 논리, 신중함의 중요성

일반인을 포함한 특히 대중문화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덕목 중의 하나가 바로 "절제"입니다.
일에 집중하다 보면 조금 더해지는 욕심을 발견하게 되고 조금만 조금만이라는 자기 합리화와 어리석은 긍정의 힘을 돌이킬 수 없는 뼈아픈 상황을 초래합니다.

과유불급 [過猶不及 ] 이라는 말처럼 이는 게으른 사람, 부진한 성적을 유지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열정이 있고 현재 주목 할 만한 성적을 이루는 사람에게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최근 들어 알리가 보여 준 긍정적 영향력과 인지도 만큼은 어느 가수에게도 뒤지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순풍에 돗단듯한 현재의 상황이 불씨의 요소로 작용하지는 않았을까요?


얼마전 친구의 권유로 우연찮게 이름도 유명한 "나꼼수"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매번 영상이 나오지 않은 이유로 그리고 자기들만의 허심탄회한 얘기마당인지라 저는 열린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꼼수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친한 친구를 만나서 포차에서 소주를 걸치는 듯한 친숙함과 걸쭉한 입담을 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에 흐를수록 그들의 입에서 말끝마다 혹은 말 도입부에서 "씨팔"이라는 저속한 용어가 튀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재미로 듣다가 나중에는 뭔가 잘못 됐다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는 "나꼼수"는 600만명의 독자를 형성하며 국민적 지대한 관심 속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춘 언론매체로 자리잡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수의 국민은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쾌재를 울리고 공감하며 공분을 불러 일으킵니다. 말이 자신의 입을 떠나면 자신의 전유물이 아니듯이 나꼼수의 출연진 또한 누구보다도 이러한 무거운 책임감을 스스로 고취해야 할 입장인 듯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절제하거나 주의하지 못했습니다.
막돼먹은 학생들이 지껄이는 그런 저속한 용어를 개성과 멋으로 이해하며 국민을 상대로 그들의 수준과 분위기에 합류하라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이렇게 쿨하게 되었을까요?

내용이 옳고 공감이 가면 상대방의 약점이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나면 x같은 용어를 써도 되는지 의문스럽고 무엇보다 국민 모두가 접하는 상황에 그렇게 싸구려 멘트를 날려야 될까하는 고민에 빠져봅니다.

아무리 논리와 설득력은 갖고 있어도 자기 절제와 신중함을 겸비하지 못한다면 언제나 서로 물고 뜯는 아수라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입니다.

결국, 대중문화와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자신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점점 굳어져가는 느낌입니다.
설령 물불을 가리며 논리적으로 조심스럽게 문제에 접근한다고 하지만 이또한  기본 이하의 의식에 바탕을 둔 관계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질 않은 결과물을 낳기도 합니다.

나영이를 비롯한 일반 사람들이 겪는 대다수의 고통과 충격은 보이지 않은 창살이 되어 사람들을 구속하고 무의식 가운데 그들의 행동과 사고에 제재를 가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나영이는 이러한 갑갑한 창살에서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으려 할 때 알리의 용단으로 인해 순간 원상회복 된 느낌입니다. 이제 막 상처에서 딱지가 생겼는데 알리의 성급이 딱지를 떼어내 그곳에서 다시 피가 흘러 나오는 격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 커지다보니 알리가 제아무리 안타까움의 울음을 터트리고 심지어 자신의 치부를 들춰도 사건이 좀처럼 진정 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누구 개인을 떠나서 우리 모두는
너무도 많이 맹목적 성공지향주의에 길들여져 왔으며
내가 아닌 남에 관한 주의나 절제는 대수롭지 않은 덕목이 된 듯 합니다.
많은 것을 얻기에 급급했고 이른 시간에 소기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관행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순수했던 동기와 진정성을 운운하며 지나친 과욕을 변호하려 했던 것은 아닐런지요?

우리는 알리의 이번 사건을 통해
됨됨이 보다는 소기의 목적이,  이해보다는 설득이 우선이고
화끈한 결과가 모든 동기와 과정을 정당화시킨 현실을 다시금 재확인하는 듯 합니다.

나영이의 상처는
어떤 의지와도 상관 없이 어떤 노력에도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며

알리의 눈물은
성급함과 개인주의가 팽배한 환경 가운데
그 단순한 사랑과 위로가 전달되기 쉬운 요소가 아니란 생각갖게 합니다.

나영이의 상처와 알리의 눈물을 보면서 이것은 사건의 발단과 책임소지를 따지기 이전에
우리 모두가 함께 안고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우리 모두가 이러한 환경이 가능케 한 동조자이자 비겁한 방관자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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