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하인을 묶어 매질하는데 쓰이는 고목나무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옷깃을 여미어도 살을 파고드는 매서운 찬바람은 오히려 무뎌진 예술인의 감성에 뜨거운 불을 지피기도 하고
차가움으로 오싹해진 황량한 거리는 따뜻한 온기를 지피기 위해 창작의 붓을 들게 하는 동기가 된다.

 

 

 

억압이란 제약과 환경에 인내는 미덕으로 ....

 

아주 어릴적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고향인 전남 영암에 간적이 있습니다.

 

유명한 월출산이 있는 영암은 통일신라 시대의 3대 무역항 가운데 하나이자 세계챔피온 복서 문성길(논산 훈련소 내무반의 제 옆자리)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요즘엔 F1의 경기장으로 간혹 언론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개발이 더딘 느낌입니다. 어릴적 기억으로 뒷산엘 가면 아름드리 대나무가 키재기 하듯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에 고궁 같은 아주 오래된 집을 볼 수 있습니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옛집을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뒤뜰에 우두커니 서있는 한 그루 나무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옛날 머슴들이 잘못을 했을때 묶어다가 매질을 하는 곳이라는 아버지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죄인들은 관가에 끌려가서 십자모양의 틀에 묶여 곤장을 맞는데 일반 가정 집에서 머습을 묶어다가 몽둥이질을 한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 일이었으며 한편으로 그 상황에서 그 머슴은 얼마나 끔찍한 고통과 공포를 느꼈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예전에 그렇게 못된 악행을 벌였기에 그 벌로 625사변때 공산당에게 죽임 당하지 않은 집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군생활을 할때 물당번과 식기당번이란게 있습니다. 쉽게 보면 물당번은 동료병사들이 필요로 하는 물을 항상 준비하고 상병이나 달아야 맡게 되는 식기당번은 식사를 위한 배식판을 책임지는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병장이나 고참들이 올때면

<식기당번>은 잽싸게 해당병사의 식기를 대령하지만 상병이하 후임, 신참들에게는 매우 엄격한 태도를 취하곤 합니다.

때로는 이것도 식기를 닦은거냐며 식기를 땅바닥에 내던지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즐거운 식사시간을 돕는 과정이 아니라 병사들의 군기를 잡는 서열이라고 볼 수 있겠죠. 때떄로 그들에게서 분노와 증오에 찬 눈빛을 보면서 이런 관행은 도대체 어디서 시작되었으며 굳이 행복해야 할 식사시간에 이런 일들이 왜 벌어져야할까 라는 반문을 갖게 합니다.

 

고향에서 하인들을 묶어 매질하는 나무를 보면서 식사시간에 식기를 땅바닦에 내던지는 식기당번을 보면서 한국사회에 어느 정도 잔존하는 억압과 제한이라는 문화적 어두운 흔적들을 엿보는 듯 합니다.

 

일각에서는 불교가 지배적이던 통일신라 시대가 오히려 여성을 비롯한 인권이 존중되었는데 반해 이씨 조선시대에 들어 유교가 확립되면서 남존여비의 사상이 농후해졌고 예전보다 더 제도적으로 억압적으로 사회분위기가 변했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억압적이고 고압적인 부분적인 사회환경 때문에 많은 사회구성원들이 침체된 경기와 상관 없이 힘들어하는 것 아닌가 생각되고원인이야 과정이야 어떠하든 선진국에 비해 이와같은 현저한 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은 하루빨리 없어져야 하지만 그래도 군을 포함한 여러 분야에서 전에 비해 훨씬 좋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괜한 노파심은 어쩔 수 없습니다.

 

수많은 청소년들은 꿈을 좇아 활기발랄한 모습으로 주체 못할 끼와 에너지를 발산해야 하건만 학원과 학교를 전전긍긍해야 하고

많은 청년들은 게임에 파뭍혀 미지의 세계를 헤매는 것은 이제 우리 주변의 자연스런 현상이 된듯 억압된 제도와 환경 가운데 그나마 무언가 돌파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갖게 합니다.

 

공지영 작가 쓴 "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는 책을 보면 지혜롭고 능력 있는 세명의 단짝친구(혜완, 경혜, 영선)가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자기의 재능에 걸맞게 사회에서 성공이라는 큰 꿈을 그리고 단란한 가정에서의 행복을 꿈꿔보지만 작가인 혜완은 사고로 자녀를 잃고 남편과 이혼하지만 늘 남자의 그늘 아래 놓여진 자신을 보며 괴로워하고 경혜는 탄탄한 직업을 갖고서 딱히 고민이 없어 보이나 남편과의 끝없는 갈등으로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영선은 이와 달리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남편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지만 자기상실감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어 나머지 두 친구의 재출발에 큰 영향을 끼치는 내용으로

이또한 꿈에 대한 억압과 제약적 환경의 일면을 보는 듯 합니다.

 

필자의 입장에서 이 세친구들의 삶의 방식과 태도에 문제가 조금 있다고 봅니다. 자신의 능력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내게 인생을 맞추느냐 격한 인생에 내가 유연하게 함께하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많은 억압과 거절, 제한의 환경은 모순이 아니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인생 그 자체일 것입니다.

단지 그 속에서 큰 상실감을 안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결과는 상처와 원망일뿐, 내 생각과 전혀 다른 현실을 맞아 담담히 그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본분과 꿈을 향해 묵묵히 정진함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왜냐면 인생이란 하나를 더했을 때 두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잃었을 때 두개를 얻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