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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의 고집, 강우석의 독설 (갑과 을의 관계)

 

 

 

 

 

 

 

 

 

 

1633년 6월 22일, 갈릴레오는 2차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교황청의 압력으로 그동안 주장해 왔던 <지동설>을 철회하지만 재판장을 나오는 순간.....   " 그래도 지구는 돈다 " 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1564년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피렌체에서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의사가 되기 위해 피사대학의 의학부에 들어가지만 이후 자신의 적성에 따라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게 되고 결국 그는 피사대학의 수학 강사를 거쳐 베네치아공화국의 파도바대학의 교수가 됩니다.

그는 이때 축성술, 기계공작기술상의 여러 문제를 연구하면서 동력학에 접어들기도 하며 유명한 <관성의 법칙>도 이때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1609년 네덜란드에서 발명된 망원경을 개량하여 천체 관측을 하게 되는데 이로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증명할 계기를 얻게 되고 그가 피렌체의 궁정 소속의 수학자가 된 후로도 이러한 자신의 주장(성서와 지동설의 모순)을 친구들에게 전하게 됩니다.

 

이것은 당시 교황청의 권위와 사회질서에 크게 위배되는 사건으로 급기야 교황청의 눈엣가시로 전락한 갈릴레오는 교황청의 <이단심문소>에서 지동설에 대한 함구령을 받게 됩니다.

천체관측이 발달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갈릴레이는 여전히 지동설에 입각한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피력하며 교황청의 도서검열계로부터 지동설이 가설이다는 전제하의 출판을 허용한다는 근거로 1632년 책을 출판하게 되는데 급기야 1632년 2월 발간된 이책은 그해 7월에 금서목록에 오르며 이듬해 그의 나이 70세에 <종신 금고형>이 선고 된 <2차 재판>을 받게 됩니다.

이후 5년 뒤에도 책을 출판하며 연구에 몰두하지만 장시간 무리한 망원경 관측 때문에 갈릴레이는 실명하게 되고 1642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지난 4월 초, 좀처럼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영화계의 거장 강우석 감독이 베일을 벗고 힐링캠프에 등장했었습니다.

국내 최다 관객수를 동원한 감독, 전국 암산왕이라는 명석함을 자랑하고 고집? 주관이 뚜렷한 감독, 배우에게 절대 모니터링을 허용하지 않은 감독 , 남들은 한편의 영화를 준비하는데 2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하는데 반해 그는 해마다 한편씩 영화를 만들고 동시에 10여개의 영화에 관여한다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매혹적인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은바 있습니다.

 

이처럼 동분서주, 활개?를 치던 이유로 동료 주변의 영화인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하소연도 해보지만 무엇보다 재미없는 영화는 빨리 망해야 한다는 말 때문에 흥행성은 떨어져도 작품성이 뛰어난 저예산 작품의 영화인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심한 홍역을 치루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후의 부연 설명은 이미 물이 엎질러진 마당에 별다른 소용이 없었고 전혀 설득력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강우석 감독이 분명히 얘기했던 <재미없는 영화는 빨리 망해야 한다>는 말이 근본적으로 강감독 스스로 철회하고픈 <실수>였을까 하는 반문을 갖게 하는데 필자는 생각컨데 강감독은 이와같은 무례하고 무책임한 명제에 부인은 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재미없는 영화는 모두 작품성, 예술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폭넓은 의미에서 작품성도 재미도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영화는 빨리 없어져야 하고 차라리 생기질 않았어야 한다는 뜻일수도 있습니다.

 

장황하게 두인물을 늘어놓았지만.....

이들에게는 한가지 공통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름아닌 자신의 한마디 내 뱉은 말때문에 엄청난 힘든 대가를 치뤘으나 그 말을 근본적으로 부인할 수 없으며 항상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강감독의 이 말을 바꿔말해 확대해석한다면 경쟁력이 없는 가게는 문을 닫아야 하고 불친절하고 서비스가 형편이 없는 점포는 빨리 망해야 한다...라는 가설도 상상해 봄직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요즘 한창 뜨거운 감자로 화두에 오르내리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일수 있고 대형마트와 구멍가게, 약육강식의 논리가 철저히 적용되는 자본주의와도 무관해 보이질 않습니다.

 

가지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는 말처럼 대기업의 횡포와 탈세혐의는 우리 주변에서 단골메뉴가 된 느낌이며 때문에 대기업과 재벌은 가엾은 국민과 대중의 공공의 적으로 묘사되는 실정입니다. 소수 사악한 악덕업주와 재벌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를 조정하고 개도해야 할 정부는 무슨 이유에선지 여지껏 방조하고 내버려 둔 인상은 지울 수 없는 대목입니다.

이래서 조직이 발전을 거듭하고 거대해지면 겉잡을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고 결국 모두에게 해가 된다는 믿음?이 확산되는 사회분위기 가운데 거대조직의 방지와 권력의 분산화가 시대의 새로운 트랜드로 자리를 잡아가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기업이든 종교이든 조직이 거대해지면 모순덩어리로 묘사되고 이에 반해 의식있는 소규모의 조직이 깨어있어 보이고 사회의 롤모델로 자리를 잡아가는 형국입니다.

 

필자는 단언컨데 이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모든 기업의 원리나 생산적 활동의 원칙으로 "의미있는 곳에 반응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듯 기업이든 어떤 조직이든 강한 동기부여가 있기 때문에 발전과 부흥을 거듭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막대한 자금이나 인력이 큰 개발에 쓰여지기도 합니다. 

물론 거대조직에서 파생된 문제는 시행착오를 거쳐 보완, 수정의 작업을 필요로 할뿐 , 지금 사회에서 만연 된 막무가내식의 거대조직의 반감은 한번쯤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죽하면~~) 물론 기득권과 거대 조직의 횡포에 맞서 날카로운 비판도 필요로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소멸된 존중의 자세를 항상 겸비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 소규모의 조직이 좀더 건실하고 순수하다는 자부심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규모의 조직이란 거대조직이 성장하기 전 예전의 모습이었을뿐 작은 조직이 항상 옳고 그나마 좀더 순수하고 낫다는 생각을 삼가해야 하고 자신의 강점만 봐달라는 주문이 아닌 경쟁을 이겨내기 위해 산재한 문제에 고민하고 자신의 부족함에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거대조직은 알게 모르게 드러나는 문제에 관해 항상 수정,보완해 가야 하며

작은 집단의 경우 좀 더 건강해지고 부흥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에 엄살 부리지 말고 피나는 노력을 필요로 할 뿐

 

 

사회에 만연한 서로의 반감과 불신, 자기 합리화로 점철된 반목질시는 스스로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것입니다.

 

갈릴레이가 진리에 대한 고집을 꺽지 않음 같이 거대조직 또한 공동체의식사회적 기여라는 진리에 역행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될 것이며

강우석의 <독설>을 교훈 삼아 소규모 집단은 동정과 핑계의 습관을 떨치고 피나는 노력존중의 덕목을 함께 갖춰야 하리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