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언론사는 과열 된 양상을 보이며 서로 자극적인 그리고 눈길을 끄는 소식들을 모으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어쩌면 넘쳐나는 소식과 사건들로 지면이 절대적으로 모자란다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블로거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모두가 평론가요 칼럼리스트가 되어서 여기에 한마디씩 멘트를 날리기에 바쁜 모습입니다.
최근 방송가에서 인기를 모으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등장한 심사위원을 가리켜
"심사놀음"을 즐긴다는 얘기처럼 이제는 일반 대중 모두가 <평가,판단 놀음>을 즐기는 분위기 입니다.
평가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 시사적인 고민의 문제제기의 부정이 아니라 어떤 삶의 적용과 대안을 고려하지
않고 일단 던져나 보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기자스러운 멘트는 뭔가 돌이켜 봐야 할 점이라 생각합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채 몇 분도 되지 않고 쏟아내는 정보와 매서운 평가 이면에 스스로 삶에 있어서 얼만큼 교훈을 깨닫고 적용이 이뤄지는지 되짚어 봐야 할 것입니다.
이번 나가수의 11차 라운드 2차에서 박완규의 <고해>는 단연 최고의 무대였고 숱한 기사의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그의 무대가 있기까지 작곡자와의 언쟁?이 있었고 가삿말에 대한 임재범의 설명도 <고해>가 남다르게 이해되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고해란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받기 위하여 하느님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고백하여
용서를 받는 일인데..... 요즘 사람들은 <고해>라고 하면 그냥 임재범의 히트곡으로 이해하려는 성향을 보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 본질에 대한 이해와 적용이 아니라 정작 필요한 정의와 이해는 상관 없이 군중심리?에 이끌려 남들이
얘기하고 생각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그냥 하나의 문화로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일반 세상의 현상을 포함한 종교 역시 하나의 <문화적 상품>이나 사회현상의 부산물로 고착 된 인상입니다.
바꿔 얘기하자면
<고해>를 얘기 할 때 고해란 무엇이며 이것은 어떤 성질을 갖고 있으며 어떤 형태로 표현 되며 또 고해자의 모순과
태도...그리고 기본적인 조건...여러가지를 거론할 수 있습니다. 굳이 이렇게 촌스럽게 여러 항목을 거론 할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삶의 특성상 이러한 모든 것들이 너무도 밀접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고해자는 단순 <고해>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가 용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은 맞는데... 과연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맞는 얘기라고 생각합니까?
물론 임재범이 노래했던 모든 의지가 소진 상태에서의 <고해>와 박완규의 때쓰는 <고해>...
여기에서 자기 주관을 정립 할 여력도 없어 보이고 반면 아직까지 고개 숙이지 않은 오기와 근성을 살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잡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일지라도 원인이 자의든 타의든 거기에 자신이 감당해야 할 <희생>을
각오하는 내면의 다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아니면 큰 낭패를 맛보면서도 말 한마디면
한번 용서를 구한면 끝난다는 심산은 지독한 자기 꼼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당치도 않은 <고해>가 죄사함의 근거가 되는 것은 죄를 대신하는 종교적인 대가가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예전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죄를 대신해서 동물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세가지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1, 죄인 2, 제물 3, 제사장
희생의 의미가 가장 돋보여야 할 상황에서 요즘은 모두가 <제사장 놀음>에 심취한 모양입니다.
제사장은 제물을 신께 드리려 그의 손에 든 칼에 피를 묻히지만 이후로 그는 본인 스스로 다짐하는 희생이 아닌
어떤 대신 죽어 줄 존재, 제물을 찾기에 혈안이 된 모습을 보이며 때로는 광기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 거리기도
합니다. 이것이 <제사장 놀음>이고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절규하는 기도 / 골방에서 남몰래 입술을 깨무는 기도
예전, 나가수의 재해석, 오해와 진실을 말하다"에서 언급한 내용처럼 가수의 모든 것 ...하나하나에 의미 없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소리를 크게 질러대야 청중에게 큰 호응을 끌어 낼 수 있지만 이것을 무작정 비판의 요소로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소리 크다고 소위 장땡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청중이 그렇게 바보스럽습니까?
같은 고함, 큰 소리에도 폐부를 찌르는 절규와 호소력이 있고 귀를 거스르는 민폐가 있습니까?
그것도 구분 못하며 막무가내식의 <성대대결>이란 우숩잖은 말을 거론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노래나 모든 표현에 있어서 논리적이고 차분한 표현과 옷을 찢으며 머리에 재를 뿌리며 호소하는 절규가 있습니다
무엇이 정답일까요? 딱히 정답을 나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절규하는 호소가 설득력이 아무래도 있을 것 입니다.
아무리 발라드 노래를 부르고 조용한 이론을 펼치더라도 절정인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는 표현의 극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말도 안되는 것을 부모에게 요구하지만 그들이 발버둥치며 떼를 쓰면 입장이 달라집니다. 부모는 으름장을 놓으며 한두번 매를 들어도 보지만 결국 아이들의 바램을 들어 주기 일쑤입니다.
무대에서 노래를 해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하실 겁니다. 오히려 조용한 곡이 최대한의 에너지를 쏟아 낼 최적의 노래라는 것을...
같은 노래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발라드/ 이것은 헤비메탈.... 이렇게 딱 떨어지게 구분할 수 없고 그 안에서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때론 템포와 강약을 조절하며 (감정을 포함) 노래를 조율해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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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노래의 기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소리 지르는게 유리하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임재범이 그랬고 박완규가 그랬듯이 사람을 울리는 것을
사람을 울리는 것은 소리가 아닌....소리로 뛰쳐 나올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애환과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만큼 이해 할 수 있고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경험했고 그 과정이 혹독하고 처절했기에 이러한 발산/ 폭발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단지 이것은 인격의 완전한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이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결과만을 감상하고 이에 평론을 즐기지만....그러면서 자기들도 다들 이러한 아픔을 겪었다고 하지만
00도 등급이 있듯이 아픔에도 차이가 있고 이에 따른 인격의 승화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단지 사람들은 고해로 모든 죄를 단번에 용서 받는다는 쿨한 자세로 이상의 어려움. 복잡함을 얼버무리곤 합니다.
때문에 아픈 사람의 절규하는 <고해>는 그렇게 추해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들의 눈물은 대중을 대신하는 울음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공감하고 상한 마음을 달래기도 합니다.
편지 / 향기 / 투영 / 반사체
사람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 하나의 우주 , 가장 완벽한? 존재....이렇게 표현합니다. 물론 사람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태양의 화사한 빛을 등에 엎고 환한 빛을 드러내는 달을 향하여 태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태양의 따뜻함과 대자연의 기운을 힘입어 빼어난 자태를 드러내는 거대한 <세상>이 숭배의 대상이 되거나
그 이상의 신적인 의미로 이해 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신의 형상을 입은 최상의 존재일뿐
인간 스스로 의롭고 완벽을 고집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신의 형상을 입은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뭇잎 하나 만들 수 있습니까? 아니면 어떤 무엇 하나를 의롭게 할 수 있습니까?
인간들이 생명을 갖고서 행하는 과학 행위도 어쩌면 절대 존재의 부산물에 대한 <장난질>에 불과합니다.
시멘트로 건물을 지어도 시멘트를 만들 수 없다는 얘깁니다.
이처럼 인간 스스로는 의로워 질 수 없고 무엇 하나 잘 할 수 있다고 장담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말 속에 <신의 거룩함>이 있고 반면 <악마의 사악함>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and beyond cure. Who can understand it? Jeremiah 17, 9-10
때문에 절대자에게 인간의 허물을 의뢰하는 <고해>가 생겼을 것이며
그래서 고해는 평가와 감상의 대상이 아닌 적용의 대상일 것입니다.